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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장정옥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57년, 대한민국 대구

최근작
2024년 2월 <[큰글자책] 빨간 풍차가 있는 집>

나비와 불꽃놀이

‘놀이’의 이데아 겨울이 시작되었다. 집을 나서면 아파트 벽을 따라서 은행나무 가로수 길이 길게 이어진다. 길에 샛노란 은행잎이 처연히 뒹굴던 날이 먼 얘기인 듯싶다. 짓뭉개진 은행의 흔적을 따라 1km에 이르는 가로수 길을 뒤로 걸어보았다. 뒤로 걸으면 내가 지나온 길이 훤히 보인다. 뒤로 걷는다는 건 지나온 길이 내 등 뒤에 감추어지는 신비로움을 잃음과 동시에, 마주 오는 사람을 보며 걸어야 하는 불편도 감수해야 한다. 이 소설을 쓰며 줄곧 뒤로 걷는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뒤로 걸으며 내 앞에서 한 걸음씩 멀어지는 길을 쳐다보려니 불안한 상념으로 가득 찼던 내 지난 시간이 훤히 보였다. 꽤 오래 잡고 있었던 소설이다. 불거진 문장 모서리를 자르고 또 자르며 이 글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갈등으로 마음을 많이 볶았다. 무엇이 그리도 힘들었을까. 호모루덴스의 사전적 의미대로 놀이의 유희적인 개념을 살려 삶의 긍정과 해학적인 의미를 담으려 했는데, 농담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도박이라는 마약 같은 특이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니체는 놀이의 정신이야 말로 인류를 위대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고, 위대한 과제를 대하는 방법으로 놀이보다 좋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인류를 위대하게 만드는 그 ‘놀이’의 이데아를 도박이라는 부조리한 상관물에 접목시켜 객관화하기가 내게 얼마나 어려운 과제였는지. 소설을 쓸 때마다 내가 그들이 되어 함께 괴로움을 당하는 건 그리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인물을 지나치게 애지중지한 자기애가 없지 않다. 귀한 자식일수록 엄하게 키워야 한다는 옛말도 있는데 자식을 응석받이로 키운 것 같아서 불편하다. 그토록 염원하던 네 번째 장편소설이 드디어 세상에 나간다. 책을 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언제나 뜨거운 솥뚜껑에 앉는 기분에서 자유로울지. 따가운 매도 좋고 뜨거운 솥뚜껑도 좋다. 내 책이 세상에 나간다는 사실은 기쁘고도 기념할 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봄의 신부

시간이고, 시간의 역사인 두 번째 소설집 『봄의 신부』는 無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 존재와 부재의 공통어를 찾다가 無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無는 없음을 뜻하고, 완벽하게 비어 있는 상태의 0을 말함이 아닌가. 그리스에서 시작된 0의 기원은 없는 것을 나타내려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0은 신의 언어이며, 없다고 말하는 순간 있는 것이 되고 마는 숫자였다. 없다고도 있다고도 단정하기 어려운 죽음처럼. 그 기호 속에 인간의 역사가 숨 쉬고 있다. ‘죽음’이란 화두가 나를 여기로 이끌었다. 예고 없이 닥치는 불행 앞에 우리는 얼마나 속수무책이었던가. 천안함 사고와 대구지하철화재참사를 비롯한 사회적 참사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아파하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좀 늦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대구지하철화재참사와 천안함 사고를 소설에 담아서 세상에 내보낸다. 대구지하철화재참사를 소설에 담기까지 1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장편소설도 아닌 경장편소설 한 편 쓰는 게 그리도 힘들었을까? 필력이 부족한 탓임을 알고도 그 소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내 고향 사람들의 얘기여서 더 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죽음이 무엇인지. 無에서 생성된 개체가 긴 생애를 거쳐 마침내 발현이 시작되는 곳에 이르게 되는 그것, 영원회귀. 삶의 도정에서, 혹은 완성되는 극점에서 맞게 되는 그 본성으로의 회귀는 인간의 시작이기도 하고 끝이기도 하다. 『봄의 신부』는 불현듯 세상을 떠나야 했던 이들을 위한 레퀴엠Requiem이다.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1호선에서 홀연히 사라진 192명의 희생자들과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사고로 세상을 떠난 46명의 젊은 영령들에게 드리는 진혼곡이자 숭고한 미사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다. 눈물로 얼룩진 잔인한 봄이었다. 더 잘 쓰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글을 쓰며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이제라도 편안히 잠드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I am….’ 그들의 떨리는 목소리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17년이 지났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살았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다 갔는지, 시간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비어 있는 그들의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린 숫자 0과 영원회귀라는 숙제가 남아있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만든 순간의 응축 그 영원 속에 인간의 삶이 존재한다. 영원 속으로 사라진 그들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이, 공허한 울림으로 흐려지지 않기를…. 2020년 여름에 이곡동 작업실에서

빨간 풍차가 있는 집

교정지를 넘기고 꽃시장으로 갔다. 슬프고도 곡진한 삶을 살아온 내 소설 속의 시지프들을 위하여 유리병 가득 아름다운 꽃을 담았다. 소설 속 인물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축하주를 마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여러 번 했다. 세 번째 소설집 『빨간 풍차가 있는 집』이 세상에 나왔다. 책을 한 권씩 묶어낼 때마다 미진하게 남은 아쉬움으로 마음이 불편했다. 다음 소설집이 언제 나올지 기약 없어서, 더는 책을 보며 후회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그래도 아쉬움은 여전하다. 첫 번째 소설집은 여자와 엄마에 관한 이야기였고, 두 번째 소설집은 크고 작은 사회적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담았다. 세 번째 소설집『빨간 풍차가 있는 집』에는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소설집을 묶으며 산마루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고통을 생각했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의 무게를 짊어진 이들. 삶을 짊어지고 가는 일이 그러했고, 내 소설 속의 인물들이 모두 시지프였다. 바위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굴러떨어지면 시지프는 다시 산을 내려간다. 실패가 간혹 인간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들을 삶의 극단으로 몰아붙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도 인간은 실패보다 강하다. 실패가 무엇인가? 내게 있어서 실패는 힘들게 밀어 올린 바위가 굴러떨어지는 것이고, 온 마음으로 믿고 의지하던 친구를 잃는 것이다. 그 좌절이 살아갈 의지를 빼앗고, 무릎을 세워 일어서야 할 이유를 모르게 하며, 급기야는 삶을 죽음과 바꾸게 하는 모질고 독한 것이긴 해도 나의 시지프들은 스스로 바위가 되어 꿋꿋하게 삶의 무게를 견딘다. 살며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특별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실패를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빨간 풍차가 있는 집』에는 인생이 실패로 뒤엉킨 사람들의 불안한 시간이 칡덩굴처럼 얽혀 있다. 그들은 실패에 쓰러지기도 하고, 구석에 숨기도 하고, 몸부림치며 일어서기도 한다. 내게는 온몸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그들이 곧 세상이다. 절망의 극단을 오르내리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나는 이 소설집을 통해서 진심 어린 위로를 보낸다. 꽃 한 다발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마는 그래도 힘내라고 속삭여 본다. 더 멋진 글로 제대로 된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는 말을 덧붙이며. 물 먹는 하마처럼 간혹 고통이 인간을 먹기도 한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한 실패는 하나의 관념으로 머물고, 어느 순간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은 친구의 기억이 된다. 거짓 실패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신이 먼저 일어나야 하고, 고통을 참고 걸을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중얼거려 본다. 길 위에 답이 있다. 하느님이 길을 만들어 놓으신 것은 고통의 순간에도 힘을 잃지 말고 일어서서 걸으라는 ‘말 없음의 말’을 하시기 위함일 것이다. 원고를 넘겼으니 다 내려놓고 서늘한 초겨울 햇살 속을 걸어보기로 한다.

숨은 눈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무심코 창을 내다보다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월 첫날에 눈이라니, 다시 보니 흰 꽃잎이었다. 창 아래 벚꽃이 피어 있었던 걸 잊고 있었다. 그 나무도 처음 아파트에 입주할 때는 작고 가느다란 묘목이었을 것이다. 이십 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는 사이 볼품 있는 나무가 되었다. 가지를 활짝 편 모양새가 제 영역을 지키는 원주민처럼 당당하다. 나무가 해를 향해 넓게 가지를 뻗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몸짓이다. 사람이고 나무고 스스로 영역을 넓히며 제 자리를 굳건히 지켜야 살아남을 수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을 맞고 서 있는 나무가 내 소설 속의 여자들 같다. 내 소설 속의 여자들은 이제 막 옮겨 심은 나무처럼 끊임없이 흔들리고 갈등한다. 그녀들이 불행한 것은 딛고 선 땅이 척박한 탓이었다고 변명해주고 싶다. 그녀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땅 냄새를 맡고 거친 바람을 이기고 땅 속 깊숙이 뿌리를 내릴 시간이. 그러고도 살아지지 않으면 좀 더 기다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당신의 아이들도 엄마가 봐주지 않는 순간을 그렇게 기다렸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뿌리가 뽑힐 듯 모질게 불던 바람을 견디면서도 그녀들은 쓰러지지 않는다. 그녀들을 지키는 것은 ‘엄마’라는 이름이다. 엄마여서 못 간 여자들의 얘기를 해보았다. 여자로 제법 많은 시간을 살았는데 아직도 나를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 여자였나 하면 엄마였고 엄마였나, 하고 돌아보면 다만 인간이고 싶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여자들의 얘기를 쓰고 있으려니 내가 인간으로 살려고 몸부림치던 순간에 나를 지켜보던 가족들이 조금은 외로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수시로 후들거렸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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